1. 모든 악당도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악인이 태어나는지, 만들어지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오릅니다. 정작 그 악인들 자신은, 스스로를 악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놀랍게도 답은 대부분 ‘아니오’입니다. 우리는 악인을 떠올리면 잔인하고 냉혹하며 죄책감이 없는 사람을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악인은 오히려 자신이 세상을 구한다고 믿습니다.
레미제라블의 자베르는 자신이 법과 정의의 수호자라고 믿습니다. 어벤져스의 타노스는 자신의 학살이 우주를 구원하는 균형이라고 확신합니다. 데스노트의 야가미 라이토는 스스로를 새로운 세상의 신이라 여기죠. 흔히 하는 말처럼, 모든 악당은 자기 이야기 속에서는 주인공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들이 왜 그렇게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 믿음이 우리와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2. 이야기속 악인 – 나만의 정의를 믿는 사람들
‘레미제라블’의 자베르는 법을 어긴 사람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신념을 평생 지켜온 경관입니다. 그에게 장발장을 쫓는 일은 악행이 아니라 정의 그 자체였죠. ‘어벤져스’의 타노스는 자원이 유한한 우주에서 절반의 생명을 없애는 것이 오히려 자비라고 믿습니다. 그의 논리 안에서 그는 학살자가 아니라 구원자입니다. ‘블랙팬서’의 킬몽거는 오랜 세월 억압받아온 전 세계 흑인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명분으로 폭력적인 혁명을 정당화합니다. 그의 분노에는 실제 역사적 부당함이라는 뿌리가 있다는 점에서, 이 인물은 유난히 복잡한 공감을 불러일으키죠. ‘데스노트’의 야가미 라이토는 범죄자를 심판하며 스스로를 정의의 신 ‘키라’라고 부릅니다. ‘엑스맨’의 매그니토 역시 홀로코스트를 겪은 인물로, 뮤턴트를 향한 탄압에 맞서는 폭력을 정당방위라 확신합니다.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는 마약 제조라는 범죄를 시작하고 확장하는 내내, 이 모든 것이 가족을 위한 선택이라는 명분을 놓지 않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합니다. 누구도 스스로를 파괴자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게 자신만의 확고한 ‘정의’를 가슴에 품고 있죠. 그리고 다들 자신이 무언가를 지키거나, 바로잡거나, 구원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3. 정당화의 문법 – 도덕적 정당화(Moral Justification)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는 이런 자기 정당화를 ‘도덕적 이탈’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원래 자신을 도덕적인 존재로 여기고 싶어 하기 때문에, 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나쁘게 느끼지 않으려면 몇 가지 정신적 장치를 동원하게 된다는 것이죠.
타노스의 논리를 떠올려볼까요. 그는 학살을 ‘균형’이라는 더 큰 대의로 포장합니다. 이것이 반두라가 말한 ‘도덕적 정당화(Moral Justification)’입니다. 폭력적인 행위를 더 고귀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이죠. 그렇게 자신의 폭력에 ‘정의’, ‘구원’, ‘질서’라는 거창한 명분을 부여함으로써 스스로를 죄책감으로부터 완벽히 보호합니다. 킬몽거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그는 실제 역사적 억압이라는 근거를 들어 자신의 폭력을 정당방위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이는 반두라가 말한 ‘유리한 비교’, 즉 자신의 행동을 더 큰 부당함과 견주어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 문법은 이야기 밖에서도 낯설지 않습니다. 온라인에서 누군가의 신상을 캐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면서도 스스로를 ‘정의구현’을 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 또한, 자신의 공격성을 더 정당한 명분으로 감싸는 같은 심리 기제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죠.
4. 나는 여전히 선한 사람이라는 믿음 –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제시한 인지부조화 이론도 이 현상을 잘 설명해줍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실제 행동이 어긋날 때 심한 불편함을 느낍니다. 이 불편함을 해소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에 맞춰 신념 쪽을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월터 화이트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처음엔 정말로 가족을 위해 마약 제조를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사업이 커지고 폭력이 늘어갈수록 “이건 가족을 위한 일”이라는 믿음을 점점 더 강하게 붙잡습니다. 행동이 신념보다 앞서 나가버렸기 때문에, 신념이 행동을 뒤쫓아가며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이죠.
이런 패턴은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정행위를 저지른 사람이 “다들 이렇게 한다”며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경우, 직장에서 후배를 가혹하게 몰아붙이면서도 “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고 믿는 상사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행동이 이미 벌어진 뒤, 우리는 자신이 여전히 선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 행동에 맞는 이유를 사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5. 내 안의 어둠을 상대에게 비추다 – 그림자의 투사(Projection of the Shadow)
자베르는 여러 인물 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태어난 범죄자의 아들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존재로 태어날 뻔했다는 사실을 견디기 위해, 그는 평생 법과 규율에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장발장이라는, 죄를 짓고도 선하게 살아가려는 인물을 결코 용납하지 못합니다.
칼 융(Carl Jung)은 이를 ‘그림자의 투사(Projection of the Shadow)’로 설명합니다. ‘그림자’란 내 안에 존재하지만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열등함, 잔혹함, 위선, 이기심 같은 어두운 요소들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 안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면, 즉 그림자를 갖고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을 내 안에도 이러한 어두움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대신 그것을 타인에게서 발견하고 공격함으로써 자신은 깨끗하다고 믿으려 합니다.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을 향해 쏟아부었던 그 증오는 사실,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불완전함과 법을 어길지도 모른다는 근원적 공포를 장발장이라는 인물에게 투사한 결과였습니다. 내가 상대를 때려부수는 것은 악을 징벌하는 것이므로, 나 자신은 완벽히 무결하고 신성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심리는 우리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은 얼굴로 나타납니다. 지나치게 엄격한 도덕주의자가 정작 자신의 위선이 드러났을 때 크게 무너지는 경우, 특정 집단을 향해 유독 격렬한 혐오를 드러내는 사람이 실은 자기 안의 억눌린 욕망이나 두려움을 그 집단에게 투사하고 있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정치적으로 상대 진영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며 자신의 편협함은 보지 못하는 태도 역시, 같은 그림자 투사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 확신을 의심하는 용기 – 악과 싸우는 우리가 가져야 할 단 하나의 질문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심리, 도덕적 이탈과 인지부조화, 그림자의 투사는 사실 특별히 나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 믿고 싶은 마음, 행동과 신념을 일치시키고 싶은 마음, 내 안의 어둠을 마주하기보다 밖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경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함정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내가 지금 하려는 정당화가 혹시 도덕적 이탈의 언어는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보는 습관일 것입니다. “다들 그렇게 한다”, “이건 더 큰 목적을 위한 것이다”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올 때, 그 말을 한 번 더 의심해보는 것이죠. 또한 나와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려는 노력도 중요합니다. 자신의 확신에 균열을 내는 목소리를 애써 피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자베르처럼 스스로가 정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을 악하다고 느끼는 악인은 거의 없습니다. 악인은 질문을 멈춘 사람입니다. 선한 사람은 항상 옳은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혹시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를 묻는 사람입니다. 이야기 속 영웅과 악인을 가르는 것은 힘도, 지능도, 신념도 아닙니다. 자신의 신념을 의심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