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 우리는 왜 악인의 어린 시절을 궁금해할까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속 악인들은 이유가 없었습니다. 마녀는 원래 마녀였고, 늑대는 원래 늑대였습니다. 계모는 처음부터 잔인했고, 용은 처음부터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악은 그저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을 시험하기 위해 존재하는 장치였던거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스크린을 채운 악당들을 떠올려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다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사연이 있다는 것이죠. 2019년 영화 ‘조커’는 아서 플렉이라는 한 남자가 조롱과 폭력, 사회적 냉대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두 시간 내내 보여줍니다. ‘말레피센트’는 원작 동화 속 순수한 악역을, 배신당하고 날개를 빼앗긴 피해자로 다시 썼습니다. ‘위키드’에서는 ‘사악한 서쪽마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초록색 피부로 인한 차별과 세상의 진실을 마주하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악인의 마지막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어떤 배신을 겪었는지를 함께 따라가고 그들의 동기를 알고 싶어하죠.

왜일까요? 왜 그들의 어린시절을 들여다보길 원할까요?

1. 악인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심리학은 오래전부터 인간의 공격성과 폭력성을 연구해 왔습니다. 정신분석의 프로이트는 인간 안에는 사랑하려는 힘만큼이나 공격성과 파괴성도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공격성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는 성장 과정과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충분한 사랑과 안정감을 경험한 아이는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는 법을 배웁니다. 반대로 지속적인 학대나 방임, 예측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는 세상을 안전한 곳으로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존 볼비(John Bowlby)의 애착 이론 및 대상관계이론을 적용하여 악인들의 유년기를 들여다보면 예외 없이 ‘방치, 학대, 혹은 지독한 정서적 결핍’이라는 원초적 상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믿었던 양육자로부터 거부당하고 세상으로부터 안전감을 느끼지 못할 때, 아이의 내면에는 거대한 공포가 자리 잡습니다. 이때의 트라우마를 방어하기 위해 이들은 ‘공감 능력을 차단하는 심리적 갑옷’을 입게 되며, 이것이 바로 빌런(Villain)의 심리적 기제가 됩니다. 즉, 모든 괴물의 시작에는 ‘상처받은 아이(Wounded Child)’가 존재합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폭력이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상처는 설명이 될 수는 있어도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심리학은 한 가지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악은 대부분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하지 않습니다.

2. 우리 안에 또다른 악의 이름, ‘그림자’

분석심리학자 융은 조금 다른 시선을 제시합니다. 그는 악인을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Shadow)’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림자는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질투하고 싶은 마음. 복수하고 싶은 마음. 미워하고 싶은 마음. 남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마음. 우리는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느끼면서도 숨기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림자를 끝없이 부정하면,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힘을 갖게 됩니다.

융은 인간의 성숙은 그림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가 내 안에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악인은 특별한 그림자를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그림자가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3. 왜 우리는 악인의 어린 시절에 집착하는가?

우리가 악인의 서사에 집착하고 그들의 불우한 과거를 궁금해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심리적 기제 때문입니다.

첫째, 통제감과 예측 가능성의 욕구’ 입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악을 무작정 두려워하기보다, “저런 상처를 겪었으니 저렇게 비뚤어졌겠구나”라는 인과관계를 이해함으로써 세상을 안전하게 통제하고 이해하고 싶은 방어기제이죠.

둘째, 그림자(Shadow)와의 대면’ 입니다. 칼 융의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악인의 내면은 사실 우리 안에도 억압되어 있는 분노, 질투, 파괴적 충동(그림자)의 거울상입니다. 악인을 이해하는 것은 곧 내 안의 어두운 면을 확인하고 인간 본성의 입체성을 수용하는 과정입니다.

셋째, 통제감의 회복’입니다. 원인을 알면 예측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으면 예방할 수 있다는 감각을 얻습니다. 설령 그것이 착각에 가까운 통제감이라 해도, 원인 모를 악보다는 원인이 있는 악이 심리적으로 훨씬 덜 위협적으로 느껴지죠.

넷째, 공정한 세상 가설’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이 원인과 결과로 앞뒤가 맞는 곳이라 믿고 싶어 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악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이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반대로 악행의 배경에 상처와 학대가 있었다는 서사는, 세상이 여전히 논리적으로 작동한다는 감각을 회복시켜줍니다.

다섯번째로 ‘공감 능력의 시험대’이기도 합니다. 허구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나는 어디까지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시험해볼 수 있습니다. 실제 삶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이 질문을, 이야기는 위험 부담 없이 던져볼 기회를 줍니다.

마지막으로 ‘서사적 쾌감’이라는, 조금 더 미학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입체적인 동기를 가진 악당은 단순한 인물보다 훨씬 깊은 몰입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심리학적 필요를 넘어, 잘 만든 이야기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만들어진 악은 우리에게 공감과 불편함을 동시에 안깁니다. 악당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순간 도덕적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하는 거죠. 그를 미워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판단이 유예됩니다. 더 나아가 이 서사는 “나도 그런 환경에 놓였다면 다르게 살 수 있었을까”라는, 스스로를 향한 불편한 질문까지 유발합니다.

4. 악을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몫

오늘날 오리진스토리가 이렇게 유행하는 현상 자체가, 트라우마라는 개념이 대중적으로 널리 이해되기 시작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보다 우리는 한 사람의 행동 뒤에 놓인 과거를 훨씬 더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공감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다만 이 흐름에는 함께 고민해야 할 우려도 있습니다. 가해자의 서사가 지나치게 정교하고 매력적으로 그려질수록, 정작 그 곁에 있어야 할 피해자의 자리는 조용히 지워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악당의 어린 시절에 몰입하는 동안, 그가 해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흐려지기 쉽습니다.

결국 “악인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은 둘 중 하나의 답으로 끝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질과 환경은 서로를 밀고 당기며 한 사람을 만들어가고, 같은 조건에서도 전혀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의 무게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기원을 그토록 궁금해한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가장 정직한 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이해와 용서 사이 어디까지가 우리 자신의 몫인지를 시험해보고 있는 것이죠.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