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모순’ – 사랑하는 이의 무덤위로 걸어가는 여자 안진진 캐릭터 분석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다가올 미래에 대한 계획보다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잦아진 요즘, 자꾸 옛날 책들에 눈길이 갑니다. 양귀자의 모순도 어렸을때 한번 읽었던 것 같긴한데.. 당시 세상물정 모르던 나에게 책이 준 임팩트가 없었는지.. 아님 하루하루 망가져가는 기억에 묻혀버린건지.. 당췌 생각나지 않는 스토리를 손끝으로 더듬어가며 읽어봤죠. 역시나 ‘어린 시절에는 이야기를 읽었고, 어른이 된 뒤에는 그 이야기 속의 나를 읽었다’라는 말이 와 닿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메마른 그녀의 삶이 진심으로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녀의 선택이 이해가 되기도 했죠. 오늘은 소설 속 주인공 안진진의 삶을 분석해보고 그녀의 선택을 이끈 무의식적 동기와 욕구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양귀자 ‘모순’ 줄거리

양귀자의 소설 ‘모순’의 주인공 안진진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아침, “인생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문장을 품고 깨어납니다. 폭력을 일삼다 가출을 반복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대신해 시장통에서 억척스럽게 뼈를 깎으며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 그리고 조폭을 동경하며 엇나가는 남동생. 안진진은 처리해야 할 불행이 끊이지 않는 이 집안에서 ‘지루할 틈’이 없이 살아갑니다.

반면 엄마와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이모는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성공한 건축사와 결혼하여 쌍둥이를 낳고 2층짜리 저택에서 사모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죠. 안진진은 엄마보다는 이모를 심리적으로 더 애착을 느끼며 이모의 삶을 동경하죠.

지독한 가난과 지루한 일상 속에서 방황하던 그녀는 두 명의 남자를 만나고 결혼을 고민하게 됩니다. 한명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안정적인 대기업에 다니는 나영규, 한명을 조실부모하고 형의 지원을 받아 사진작가가 된 김장우. 둘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 안진진은 만나면 가슴이 뛰며 감정이 끌리는 김장우에게 가기로 합니다.

그러던 중 이모의 자살 소식을 접하게됩니다. 모든 풍요를 누리고 완벽해 보였던 이모는 지독한 지루함과 무덤같은 평온함 속에서 스스로 삶을 끝낸것입니다. 드디어 화려한 이모 삶의 어두운 민낯을 보게 된 안진진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녀는 사진작가가 아닌 안정적인 나영규를 선택합니다.

2. 안진진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 지리멸렬한 삶을 살다

안진진의 성장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랍니다.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무책임 했으며 때때로 폭발하고 가출을 일삼았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가정을 지켜야 했던 어머니는 강인하지만 거칠었습니다. 그리고 남동생은 조폭 보스가 되는 것이 인생 목표입니다. 그녀는 이러한 가족역동안에 살면서 모든 삶에는 결핍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알아버립니다. 그리고 혼란함 속에서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선을 갖게 됩니다.  그녀는 소설속에서 자주 ‘인생의 부피’를 계산합니다. 이러한 시니컬함은 세상을 비웃는 태도가 아니라 실망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기 위한 전략, 즉 자신을 상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두른 단단한 갑옷입니다. 삶의 가혹함에 압도당하지 않으려는 심리적 방어기제 인것이죠. 이런 사람들은 생각보다 감정이 적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정이 너무 많았던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느끼지 않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심리학자 도널드 위니컷은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안전하게 표현하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참자기(True Self)’가 자란다고 보았습니다. 반대로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환경에서는 타인의 기대에 맞추는 ‘거짓자기(False Self)’가 발달하기 쉽습니다. 겉으로는 차분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여도, 그 침착함이 건강한 자기조절의 결과인지, 아니면 오래된 생존 전략인지는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3. 왜 안진진은 이모와 같은 삶을 선택했을까 : 심리학으로 보는 모순적 선택과 반복의 기제

1) 프로이트의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

인간은 과거에 해결하지 못한 심리적 갈등이나 불안을 무의식적으로 재현하여 이를 통제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안진진의 유년 시절은 ‘예측 불가능한 혼란(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 지긋지긋한 불안을 마침표 찍고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갈망합니다. 새로운 행복보다 익숙한 불행 쪽이 심리적으로 ‘이해 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에, 통제감을 얻는 것이죠.

이모의 삶이 공허함으로 끝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측 불가능한 가난(김장우)보다는 차라리 ‘다 알고 제어할 수 있는 권태(나영규)’를 선택함으로써 마음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반복 강박이 작동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낯선 행복보다 익숙한 실패 쪽이 덜 두려운 것’입니다.

2) 행동경제학의 ‘손실 회피 편향(Loss Aversion)’과 ‘불확실성 회피’

인간의 뇌는 무언가를 얻을 때의 기쁨보다 가진 것을 잃을 때의 고통을 2배 이상 크게 느낀다고 합니다. 김장우와의 사랑은 열정적이지만 미래가 불확실하며, 자칫하면 자신이 평생 증오했던 ‘가난하고 억척스러운 어머니의 삶’으로 돌아갈 위험을 내포합니다.

반면 나영규는 확실한 물질적 풍요를 보장합니다. 김장우와의 삶은 한 번도 검증되지 않은 미지수지만, 나영규와의 삶은 이미 이모를 통해 결과까지 확인된 ‘알려진 불행’인거죠. 역설적으로 이 확실성이 안진진에게는 더 안전하게 느껴졌을 수 있습니다. 안진진은 더 행복해지기 위한 모험(김장우) 대신, 불행해지지 않기 위한 방어(나영규)를 선택한 것입니다.

4. 안은진이 얻는 것 그리고 잃는 것

1) 그녀가 얻게 될 것 (안정감, 익숙함, 삶의 예측 가능성, 통제감)

더 이상 가난 때문에 굴욕을 겪지 않아도 되는 단단한 물질적 방패를 얻습니다. 매일 아침 몇 시에 일어나 무엇을 할지 계획표대로 움직이는 나영규의 궤도 안에서, 그녀는 유년 시절 그토록 원했던 ‘예측 가능한 평화’와 삶에 대한 강력한 통제권을 손에 쥐게 될 것입니다.

2) 그녀가 잃게 될 것 (생동감, 가능성, 새로운 삶, 자기 자신, 진짜 사랑, 자유)

그녀가 기꺼이 제 발로 걸어 들어간 평온의 실체는 사실 ‘자극 없는 죽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즉흥성과 생동감, 김장우와 나누었던 가슴 뛰는 사랑, 예상치 못한 인생의 희열, 그리고 날것 그대로의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예술적 감수성은 나영규의 완벽한 스케줄러 아래에서 서서히 질식해 갈 수도 있죠. 이모가 겪었던 ‘지독한 심심함과 공허’라는 유령이 언젠가 그녀의 안방 문을 두드리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5.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우리 역시 매일 선택의 기로에서 안진진과 같은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이유로 선택이란 것을 하죠. 그래서 그녀의 선택을 어리석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 대부분은 그녀가 선택하는 방식처럼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남의 불행을 눈으로 확인했다고 해서 자신의 패턴을 쉽게 바꾸지 못합니다. 그리고 경험하지 않은 교훈은 마음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다른 선택을 하라’는 단순한 교훈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에 가깝습니다.

“지금 내가 안정적이라고 믿는 선택이, 사실은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익숙한 불행은 아닌가. 반대로 지금 내가 위험하다고 밀어내는 선택이, 사실은 내가 한 번도 검증해보지 못한 가능성은 아닌가.”

안진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우리에게 정답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선택의 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해서 선택하는가, 아니면 무엇이 두려워서 선택하는가.”

이 질문 하나만 붙잡고 있어도, 우리는 적어도 안진진처럼 눈을 뜬 채 같은 실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은 피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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